증도면 유래 : 증도(曾島)
3개의 큰 섬(우전도, 앞시리섬, 뒷시리섬) 지형이 떡시루를 빼어 닮아 밀물 때 올라온 바닷물이 썰물 때는 구멍 뚫린 시루처럼 시루 바닥으로 빠져나가는 형국(서쪽에서 동쪽으로)이기 때문에, 물이 귀하다 하여 방언으로 시리섬(시루섬)이라고 부르다가, 앞시리와 우전도(羽田島)가 제방을 축조해, 두 섬이 서로 이어지면서 전증도(前甑島: 앞전, 시루증, 섬도)라 부르게 되었으며, 뒷시리는 후증도(後甑島: 뒤후, 시루증, 섬도)가 되었고, 다시 전증도와 후증도가 하나의 섬으로 합해지면서 지금은 떡시루의 의미와 여러 섬이 더해져(더할증)서 큰 섬으로 거듭난(거듭증) 뜻이 담긴 증도(曾島: 일찍증, 섬도)라 불리어 오고 있습니다.
(면소재지 : 1897년경에는 대촌으로 약 100여 호가 거주하였음)
증도면 유래 설명
시루 하면 우측 그림과 같이 바닥에 김 올라가는 구멍이 여러 개 뚫려있어 물을 부으면 물이 빠져나가 버리는 게 떡시루입니다. 일찍증(曾: 더할증, 거듭증)자는 물을 담은 밑바닥 부분과 구멍이 뚫린 깔개와 김이 올라가는 모양의 글자로 이루어지며, 시루를 본떠서 만든 글자로써 시루증(甑)의 본디 글자입니다.
그렇다면 왜 시루증(甑)자와 일찍증(曾)자를 써서 증도라고 불렀을까요? 그 이유는 섬 지형이 시루처럼 물이 빠져나가는 데서 유래했는데, 밀물 때 서쪽 짱뚱어다리 아래(중노두: 1호 방조제)로 바닷물이 올라와 썰물 때는 외갈룡↔진번, 효막동 염전 일대, 곡도↔버지(예지방조제+버지 방조제=대평방조제), 유지도↔작은 버지, 작은 버지↔돌마지 등 낮은 지형 곳곳이 떡시루처럼 뚫려 있어서(입구는 하나지만) 바닷물이 모두 빠져나갔기 때문입니다.
덕정리 마을 유래를 살펴보면 앞시리와 뒷시리, 두 개의 큰 시루가 있어도 솥이 없으면 사용할 수 없어 물을 많이 담을 수 있는 솥이 있어야 한다고 마을 이름을 덕정이라 부르게 되었는데 물이 빠져나가는 것을 큰 솥으로 막아주기 위한 뜻이 담겨 있으며 한자어로는 큰덕(德), 솥정(鼎)입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공도령, 쇄환(공도·해금) 등 무인도화 정책(1197~1417)으로 섬을 비워두는 때가 있었는데, 한 예로 1270년 공도령이 떨어지자 임자도 임치현민들은 구당사 지휘에 따라 영광군 구수산 산속으로, 흑산도 사람은 나주시 영산포로 섬사람을 모두 뭍으로 이주시켰으며, 과도한 세금이나 해적, 왜구 등의 잦은 출몰에 의해서도 섬에서 오래 터를 잡고 살기가 어렵다가 임진왜란(1592~1598) 전후 본격적으로 피난민이 섬에 입도해 살면서 지금의 입도조(조상)가 되었습니다.
증도에는 약 420년(2008년) 전 수원백씨가 난을 피해 들어와 정착하였다고 전해져 오고 있고, 1588년(선조21)에 경주최씨 최인서가 영암에서, 1600년(선조33)경에 한양조씨 조도홍이 지도 태천에서 입도하였다 하며, 전주이씨, 김해김씨, 밀양박씨, 한양조씨, 순흥안씨, 영일정씨 등 2014년 현재 19개 리(법정 5리, 행정 14리)에서 인구 약 2,000여 명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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