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람시설 문화유산 자연관광 테마여행 도보여행
글번호 제 목 작성자 작성일 조회
751   천국의 섬(성지순례) 2012/2/22 6840


크게보기 클릭

섬 교회의 어머니, 최초의 여성순교자
여성순교자 문준경(文俊卿: 1891~1950) 전도사는 1891년 2월 2일 전라남도 무안군(현 신안군: 신안군은 1969년 1월 1일 법률 제2059호에 의해 무안군에서 분군) 암태면 수곡리 문재경씨 3남 4녀 중 셋째 딸로 태어나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부지런해 주위로부터 칭찬과 기대를 한몸에 받아가며 할아버지가 진사인 비교적 유복한 가정에서 성장하여 1908년 3월 17세 되던 해에 남편 얼굴 한 번 보지 못한 채 지도면 등선리 정근택(정기운씨 삼남)씨와 결혼했으나 남편이 다른 여자와 살림을 차리는 바람에 남편의 무관심 속에서 시부모를 모시는 동안, 시아버지의 배려로 국문(한글)을 깨우칠 수 있었다.

시부모님을 잘 모신다 하여 정씨 가문의 효부로 인정받으며 사셨지만, 시집와서 남편과 잠자리를 함께 해보지도 못한 준경에게 동네 아낙네들은 자식을 낳지 못하기 때문에 남편이 외도한다고 수군거리는 등의 시기를 견디지 못해 자살을 시도하기도 했고, 정신적 고통으로 병이 들어 몸이 몹시 아팠으나 시부모님의 정성스런 병간호에 가까스로 살아났지만, 시아버지는 세상을 떠나고 시어머니는 큰 시숙(정영범)이 모시게 되자 결혼 후 만 20여 년간을 살아왔던 등선리와 증동리를 떠나 친정 큰 오라버니가 사는 목포 북교동으로 이사하여 단칸 셋방을 얻어 삯바느질하며 사는 외롭고 고달픈 삶이 이어져 갔다.

그러던 어느 날 비슷한 나이 또래였던 문경자 집사의 설득력 있는 전도로 1927년 3월 5일 북교동교회(당시 초가집의 목포교회, 전라도의 두 번째 성결교회)에서 첫 신앙생활(37세)을 시작하게 된 문준경 전도사는 1928년 4월에 세례를 받고, 1년 후부터는 집사의 직분도 받았으며, 장석초 목사(1925년 5월 북교동교회 개척), 김응조 목사(1929년 7월 북교동교회 담임), 이성봉 목사(1931년 3월 25일 북교동교회 담임)의 가르침에 큰 은혜를 받고, 1928년 6월부터 북교동교회 일부 지역을 맡아 전도하였으며, 목포에서 가까운 도서인 신안군 압해도 등 주변의 섬사람들과 친척들을 전도하는데도 힘을 썼다.

이성봉 목사의 적극 추천으로, 1931년 5월 동양 선교회 성서학원(서울신대)에 청강생(남편이 있다는 이유)으로 입학하였으며, 동양 선교회 성서학원은 3년제였으나 문준경 전도사는 학원에서 5년간 교육을 받으셨고, 1년에 6개월은 학원에서 공부하지만, 6개월은 목회 실습 기간으로 교회 개척을 위해 첫 방학 때 신안군 임자도로 내려가 20명의 신자와 60명의 주일 학생을 모은 후 가을학기에는 교회 개척을 보고하고, 1932년 7월 임자진리교회 개척(비문 1933년/ 청강생 2년째, 헌당식 1934년 6월 12일: 여덟 칸의 초가 건물, 이성봉 목사 집례), 1932년 9월 청강생에서 정식 신학생(수양생)이 되었다.

1933년 9월 증동리교회 개척시는 큰 시숙(정영범)의 손녀(정옥순) 소유 텃밭을 성전 터로 희사받고 큰 시숙이 5원의 빚을 내어 목포에서 산 기와와 목재로 1935년 2월 증동리교회를 설립(1955년 2월 20주년 행사, 이성봉 목사 집례)하여, 증동리교회에서 시무하시면서 신안군의 수많은 섬들을 여자의 몸으로 나룻배(거루)를 타거나 갯벌을 빠져서 다녀야만 하는 어려운 여건하에서도 목숨 걸고 복음을 전했으며, 대초리교회 설립(1938년, 비문 1936년), 방축리에 기도처(1938년, 비문 1936년), 제원, 우전리, 사옥도 등 섬 곳곳에 기도소를 설치했고, 1936년 6월 5개년의 동양 선교회 성서학원을 졸업했다.

전도사가 되어 육지를 마다하고, 증도로 돌아와서 자신의 몸은 하나님께 맡긴 채,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신안군에 흩어져 있는 이 섬 저 섬 수많은 섬들을 풍선(돛단배)을 타고 갯벌을 빠져 건너다니면서 1년에 고무신이 아홉 켤레씩이나 닳도록, 열정적으로 복음을 전하셨으며, 특히 바다와 더불어 살아가야 하는 섬사람들로서는 바다의 신, 바람의 신, 태양의 신이 자신들을 지켜준다고 믿고 사는 이런 오랜 전통과 불편한 교통편 때문에도 섬은 기독교 신앙을 전파하기가 가장 어려운 곳이지만, 끈질기게 주민들을 설득하고, 불쌍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자식처럼 품어 먹이고, 입히고, 돌보면서 늘 복음을 전했다.

문준경 전도사는 신유의 은사가 있어 정신병자·중풍 병자를 고쳐내 여자 의사란 말을 들었으며, 장티푸스가 퍼져 사람들이 죽어 나가자 가족들까지도 두려워서 환자를 내다 버리는 때에 문준경 전도사는 난 어차피 홀몸이니 죽어도 괜찮다며 환자들을 돌보고 죽은 사람들의 장례를 치러주었다. 새벽에는 누룽지를 거두고 잔칫집에서 음식을 가져다 가난한 집에 나눠주는 대신 거지였으며 참 목자이면서 섬사람들에게 희망의 어머니셨다. 찬송을 무척이나 잘 부르는 놀이꾼이었고, 멋들어진 노래로 사람들을 불러모아 그들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고 이어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매우 탁월한 복음전도자였다.

이러한 문준경 전도사를 보고 샤머니즘이 강한 불신자였던 섬사람들이 하나둘씩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었고, 47개의 해수욕장과 갯벌이 해안선을 두른 아름다운 섬 후증도의 중심지인 증동리에 증동리교회(순교시까지 실제 담임으로 사역하신 순교자 교회)를 기와집으로 세워(임자도 진리교회는 초가집으로 지음) 신안군 일대의 섬마다 복음을 전하는 본부로 이용하였고, 증도를 천국의 섬으로 바꾸어 놓는 문준경 전도사를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시작되어 시간이 지나갈수록 계속해서 교회가 늘어나 1,004개의 도서로 이루어진 신안군 일대에 약 100여 개 이상의 교회가 세워지는 계기가 되었다.

일제의 박해가 극에 달했던 일제강점기 말, 일제는 기독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했다. 신사참배는 우상숭배나 마찬가지여서 십계명에 위반되는 무서운 죄악이었기 때문에 죽도록 항거했고, 끝까지 신앙을 지켜갔지만, 1943년 12월 성결교단 해산이라는 잔혹한 명령을 내렸다. 이 과정에서 문준경 전도사는 신사 참배를 거부해 수차례 고문을 당했으며, 일제의 앞잡이들은 앞장서서 교회를 핍박하는 등 증동리교회의 종을 일제에 헌납하였다. 특히 증동리교회(본당 아래 옛 교회) 건물은 1,600원을 받게 하고, 경방단(일제 후방 치안담당기관)에 강제로 매각시켜 대금은 국방헌금이란 명목으로 빼앗아 갔다.

마침내 일제 36년 동안의 압박과 탄압 속에서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었으나, 마을 유지들은 교회와 마을 사이에 상대적인 문제가 있다는 이유로 교회를 돌려주지 않자, 강매 당시 지방회장이었던 김창근 목사가 찾아와 그 당시 매도 대금인 1,600원의 100배를 주면서까지 교회를 반환하라 했지만 수포가 되어, 성결교단의 총회장이셨던 박현명 목사가 내려와서도 해결되지 않아 고초 끝에 신성한 교회 문제를 할 수 없이 목포지방법원에 제소해서 승소하여 교회를 되찾았으나 친일파인 그들은 해방 후에도 교회를 점거하고 폭언과 폭행으로 예배를 방해했으며 이로 인해서 5년 동안이나 병치레를 하였다.

1950년 8월, 6·25 전쟁 때는 빨치산부대가 이웃 섬에까지 침입하여 양민을 학살하고 온갖 만행을 서슴지 않는다는 소식을 듣고 문준경 전도사는 범선 한 척을 대절해서 함께 지내던 백정희 전도사와 양도천 전도사를 미리 다른 섬으로 피난시키려고 하였으나 어머니 같은 자애로운 보살핌에 두 전도사는 감동하여 눈물로 호소하면서 같이 피하자고 했지만 목자가 신자들을 보살펴야 하고 교회를 비워둘 수 없다며 거절했고, 일제강점기 때 앞잡이였던 모(某)와 그 일당들은 또다시 공산당 빨갱이의 앞잡이로 활동하며 그들과 함께 감금·위협·공갈·협박 등 온몸이 피투성이가 되어 실신할 때까지 구타하며, 괴롭혔다.

비밀리에 계속해서 예배를 드렸다는 죄목으로 문준경 전도사와 백정희 전도사 그리고 양도천 전도사를 연행하여 무수한 고문과 악형을 가하던 9월 27일 밤, 양도천 전도사는 증동리에서 잡혀 온 문준경 전도사 그리고 이봉성 전도사와 함께 같은 배를 타고 목포 정치보위부로 압송되는 순간에도 창고 안에 구금된 무고한 양민들은 모두가 다 총살당했지만, 이러한 사실을 전혀 모른 채 살아남은 세 전도사는 9월 28일 새벽, 목포에 도착해보니 이미 국군이 상륙해 공산 인민군이 철수하고 없자 풀려났으나 문준경 전도사는 증동리 교인들을 지키려고 이성봉 전도사의 만류에도 뿌리치고 증동리교회를 찾아왔다.

증동리 마을 사람들을 수십 명씩 잡아다가 무참히 죽이던 살벌한 시기인 10월 4일 밤, 눈부시게 새하얀 모래보다 더 고운 심성과 아름답고 진실한 믿음을 가진 사랑의 사역자 문준경 전도사는 두 손을 뒤로 새끼줄에 묶인 채 몇 달간 구금되어 있던 양딸 백정희 전도사와 마을에서 잡혀 온 유지들과 함께 하얀 백사장이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섬, 증동리교회 앞 터진목(솔무등)으로 끌려와 공산 인민군과 폭도들의 만행 앞에서 “새끼를 많이 깐 씨암탉”이라는 죄명으로 두 눈을 가린 채 발길에 차이고, 날카로운 단도와 죽창으로 온몸을 잔인하게 찔려 만신창이가 되었으나 죽지 않자 가슴에 총구를 대고 총살하였다.

10월 5일 새벽 3시, 백정희 전도사와 교인들은 살려달라고 애원하면서 “당신들도 예수 믿고 천국 가십시오”라는 말과, “하나님 아버지시여! 내 영혼을 받아주소서!”라는 말을 끝으로, 장렬하고도 성결한 순교(당시 60세)로 일생을 마쳤다. 문준경 전도사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보다는 타인을 위해 몸 바쳐 헌신하는 희생과 봉사로 거룩한 순교의 꽃을 활짝 피웠다. 전라남도 서남단 해상에 흩뿌려진 114개(유인8/무인106) 섬을 품은 증도면(曾島面)은 1983년 2월 15일 면으로 승격되어,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도서가 제방(방조제)으로 막아지면서 현재는 99개(유인7/무인92)의 섬으로 이루어져 있다.

1969년 1월 1일 무안군에서 새로운 무안이라는 뜻(새로울 新, 편안할 安)으로 분리 독립한 신안군(新安郡/1004개 섬) 소속의 2개읍 12개면(14개의 큰 섬) 중 크게 5개 법정리와 작게는 19개의 행정리로 이루어진, 잔잔한 바다 위에 떠 있는 아름다운 섬 증도(천국의 섬, 당시 무안군 지도면 증동리)의 많은 사람이 모여 사는 면소재지 증동리에 증도 최초로 증동리교회(순교자교회 담임: 김상원 목사)를 설립하여 교회 개척시부터 순교시까지 18년 동안 담임(설립 후 16년)하시다 순교하셨기 때문에 실제 사역하는 동안 문준경 전도사와 교인들의 아픔과 슬픔과 애환이 서린 많은 흔적과 이야기가 있다.

순교 이후 시신이 썰물 때 떠내려갈 수도 있는 상황에서 백정희 전도사가 인민위원장에게 부탁하여 백정희 전도사와 박복엽권사(신안군 암태도가 친정)가 시신을 위쪽으로 끌어올려 놓았다가 조동례권사(문준경 전도사 조카딸/이만신목사 모친), 이만성목사(증동리교회/증경 총회장) 등 증동리교회 성도 몇 명이 물을 떠다가 시신을 씻기고 친척과 함께 장례를 치렀으며, 증동리교회 앞 솔무등(터진목) 위쪽에 임시 봉분인 가매장 형태의 묘를 만들었다가, 이듬해 2월 2일(회갑일) 증동리교회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호남지방 장으로 장례식 거행 때 백범 김구선생 장례 행렬보다 추모 인파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유가족과 증동리교회 성도들은 증동리교회 뒷산(덕산/죽산)에 묘를 쓰고, 순교지에는 비를 세워두고, 순교한 장소에도 시멘트로 지어 부어 십자가 표석을 설치하고, 약 50여 년 동안 순교일에 맞춰 하얀 옷을 입고 묘소를 찾아가 우천 시는 문준경 전도사께서 빼앗겼던 증동리교회(순교현장의 백사장 모래로 블록을 찍어 날라서 건립한, 옛 교회가 보존되어 있음: 현재 대지는 재정경재부 소유)에서 추모예배를 드리면서 실낱같은 끄나풀을 이어왔으며, 6·25 때 사람을 많이 죽였던 솔무등 해변에 앞시리와 뒷시리를 연결하는 외각 순환도로가 뚫리면서 공원화되어, 현재는 교회 앞 순교지로 다시 이장하여 모셨다.

순교지에는 문준경 전도사의 거룩하고 순결한 한 밀알의 씨앗으로 수많은 열매를 맺게 된, 순교의 뜻을 기리는 기념비가 추가로 더 세워졌으며, 1964년 10월 6일 증동리 교인들이 세운 순교 비문에는 이렇게 기록 되어 있다. 빈한자의 위로 되고, 병든 자의 의사, 아해 낳는 집의 산파, 문맹퇴치 미신타파의 선봉자, 압해·지도·임자·자은·암태·안좌 등지에 복음전도, 진리·증동리·대초리·방축리교회 설립, 모든 것을 섬사람들을 위하였고 자신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취한 것이 없었다. 그대의 이름에 하나님의 은총이 영원이 깃들기를! 우리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를 위하여 감사에 충만한 증동리교회라 적혀 있다.

1951년 호남지방회에서 증동리교회 앞에 세운 비에 밀알 한 개가 따에 떠러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나니라(요12:24)고 적힌 말씀처럼 문준경 전도사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한 알의 밀알이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어 한국교회의 기라성 같은 지도자를 배출하는데 크게 공헌했으며, 증동리교회 출신 전 한국기독교 총연합회 대표회장(기성총회장) 이만신목사, 성결교단 전 총회장 이만성목사, 전 총무 이봉성목사, 신복윤목사(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 총장), 장로 교단 CCC를 설립하신 김준곤목사(총재), 안산제일교회 고훈목사(서울서남노회 회장), 한신대 총장을 역임하신 고재식박사도 있다.

또한, 한국교회 치유상담의 전도사 역할을 한 정태기목사(박사, 법관), 성결교단 북교동교회 담임 지역총회장 김정목사, 우전리교회 지역총회장 안승갑, 이공신, 이경순, 김신배목사, 성결교단 28대 부흥사 회장 박문석목사, 전주 박훈용목사, 성결신문기자 조재석 편집국장도 순교 기념교회(병풍리) 출신이며, 교수와 박사, 법관, 기업가에 이르기까지 약 100여 명에 가까운 목회자가 배출된 것도 문준경 전도사의 영향이며, 문준경 전도사는 한국기독교 역사에 있어 대표적인 순교자이자, 신앙의 모범적인 삶을 사신 분으로 문준경 전도사가 머무는 곳마다 사람들이 모여들어 예배소가 되고, 교회가 세워졌다.

가구 약 1,000여 세대, 인구 약 2,000여 명이 사는 전국 복음화율 1위의 섬, 증도는 마을마다 전체 11개의 교회가 세워져 있고, 주민 90% 이상이 기독교인으로 증도 출신 목회자는 108명 이상, 순교자교회가 자리 잡은 증동리 마을의 목회자만도 39명이다. 증도 주민들의 삶은 그야말로 신앙 중심의 삶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이러한 영향력은 신안군 도서 전체로 퍼져나가 지금까지도 각 교회에 미치고 있고, 신안군의 복음화율 역시 35% 이상으로 국내에서 기독교인 비율이 제일 높은 곳이다. 문준경 전도사의 삶과 죽음은 지금도 증도 주민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있고 주민들의 자손을 통해 번져 나가고 있다.

문준경 전도사의 헌신적인 섬김과 전도, 그리고 그 마지막은 순교의 현장이었다. 마치 예수님이 공생애를 마치고 돌아가셨지만, 그분의 삶과 죽음이 제자들과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며 구전되다가 신약성서가 쓰여지게 된 것처럼, 전도사님의 행적을 천국의 섬 등 여러 권의 책으로 발간된 바 있고, 남도의 백합화(2009. 5), CBS 최초의 창사특집드라마 시루섬(2009. 12. 14~15)을 방영한 바 있다. 문준경 전도사가 사랑하고, 그 영혼이 살아 숨쉬는 섬 증도는 천국의 섬답게 민박집 상호 역시도 시루섬(曾島), 임마누엘, 에덴, 은혜, 성지, 에벤에셀, 샬롬, 시온 등 그야말로 천국에 온듯 한 느낌을 받게 된다.

신앙을 지키기 위해 현실의 행복과 편안함을 포기하고, 하나밖에 없는 생명을 바친 한국 교회가 배출한 대표적 여성 순교자이며, 도서 영혼의 어머니이신 문준경 전도사, 아버지의 뜻을 따라 골고다를 택하셨던 예수님처럼 그 사랑을 이어받아 피할 수 있었던 길을 피하지 않으시고 성도들을 아끼고 사랑하여 영적인 어미의 마음으로 순교에 임하셨기에 문준경 전도사가 흘린 피는 영원히 시들지 않는 꽃으로 우리 곁에 남아 있다. 그 깊은 마음을 알고 있기에 아직까지 그 당시 함께 한 증동리교회 어르신들은 지금도 존경하는 선생님, 그리움의 어머님으로 문준경 전도사의 모습을 가슴에 깊이 품고 살아가고 있다.

순교하신 후 기념교회로 병풍리교회를 세웠다. 또한, 증도 교회를 중심으로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사업회가 있었고, 많은 일을 해 왔으며, 증동리교회와 순교지 주변에 대규모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2010. 8. 27 착공~2013. 5. 21 개관: 약 47억)을 기독교대한성결교회에서 모금하여 건립했는데 정작 실제로 사역하셨던 순교자 교회인 증동리교회에 대해서는 자료가 빈약하다. 웅장한 건물도 좋고, 자랑도 좋다. 그러나 누가 무엇을 보여주고, 어떻게 순교 영성을 느끼고 돌아가게 할 것인가는 더 중요하다. 증도에는 숙박업소도, 음식점도, 특산품 판매소도 많다. 순교기념관은 순수하게 운영되길 바란다.

파란 하늘과 광활한 서해가 펼쳐진 증동리, 솔무등, 터진목, 문준경 전도사가 증동리교회와 성도들을 지키다 하나님 품에 안기신 그 참혹했던 순교현장에 증동리교회 교인들이 설치한 십자가 순교 표지석이 지금은 도로 속에 묻혀있고 앞쪽은 파도가 몰려와서 넘칠 듯이 출렁이는 넓은 백사장이었으며, 뒤로는 문준경 전도사가 세운 증동리교회와 복음전파를 위해 발이 닳도록 쫓아다녔던 증동리 마을이 있다. 순교지 좌측에 증동리교회에서 교인들이 처음 세운 순교비는 매서운 바닷바람과 모진 세월 속에 닳고 닳아 순교비 좌측면에 새겨진 증동리교회 겁립이란 글씨마저 희미해져 그 사실조차도 잃어버린 듯하다.

증도를 찾는 많은 사람들은 증도대교를 무심코 통과한다. 그러나 문준경 전도사를 알고자 한다면 사정은 다르다. 증도대교 아래 썰물 때 드러나는 광암 노두 길은 문준경 전도사가 나룻배를 타기 위해서 수도 없이 지나다녔던 갯벌 위에 돌이 놓인 돌 징검다리 길로, 지금은 광암 노두길 마저도 갯벌 속에 묻혀가고 있다. 또한, 증동리교회 옆에는 산으로 오르는 길이 있다. 문준경 전도사가 올라가서 하나님께 기도드렸던 바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이 산 정상을 오르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등산을 좋아하는 관광객들이 증도 최고봉인 상정봉에 올라 남북한을 빼어닮은 한반도 모습을 내려다보기 위해서다.

교회적 행사로 일반관광지를 찾는 것도 좋겠지만, 성결인 이라면 누구나 문준경 전도사 순교 사역지를 다녀가는 것도 큰 의미가 있을 것이다. 증동리교회(건립 후부터 순교 시까지 16년 동안 담임하신 교회)와 보존되어 있는 옛 교회(증동리교회 앞), 상정봉 기도 바위(증동리교회 위쪽 산, 상정봉에서 100m 거리), 증동리교회 앞 순교비(호남지방회 건립), 교회 앞 순교지(증동리교회 주변 앞쪽), 순교지의 순교비(증동리교회 건립), 순교기념관(증동리교회 주변 옆), 광암 노두(증도대교 아래) 등을 살펴보시고, 대초리교회(2번째 세운 교회), 화도 노두 등 흔적을 찾아 의미 있는 순교 역사를 접하시길 바란다.

신앙의 꽃이 활짝 피어올라 민족 복음화를 앞당기는 일에 공헌한 문준경 전도사 같은 순교신앙이 절실히 요구되는 오늘날 문준경 전도사가 못다한 사역은 우리에게 맡겨진 사명이고 살아남은 기독인들의 몫이다. 물질에 타락한 현대 교회상을 이대로 고스란히 후대에 물려주게 된다면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심판을 면치 못할 것이다. 다행히도 많은 순례자들께서 증동리교회와 순교지와 기도바위와 노두길 등 문준경 전도사 실제 사역지를 순례하면서 문준경 전도사를 추모하는 진실된 마음으로 순교 역사를 접하고 하나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굳건한 믿음으로 재무장하며 마음을 새롭게 갖는 기회로 삼고 있다.

내가 본 문준경 전도사, 김준곤목사(한국대학생선교회 총재)
내 삶과 신앙에 가장 큰 영향을 준 분이 바로 문준경 전도사님이다.전도사님은 내가 초등학교 시절 외롭게 사는 어머니를 위해 나룻배를 두 번씩이나 갈아타고 찾아오시곤 했다. 한 아름의 과자 선물과 함께 나를 껴안고 간절히 기도해주시던 기억이 새롭다. 전도사님께서 특유의 아름다운 음성으로 희망가나 천당가를 부르면 동네 아낙들이 모두 모였고 이때부터 일장 전도가 시작됐다. 내가 신학교를 졸업하고 몸이 약해 전도사님이 사역하던 섬에서 3개월간 지낸 적이 있었다.교회와 사택은 가난하고 갈 곳 없는 이들의 휴식처였다.이곳저곳을 찾아다니며 아기를 받고 병도 치료해 주고 기도를 아끼지 않았다.

문준경 전도사가 최초로 세운 임자진리교회 48인 순교
임자진리교회 기둥이셨던 순교자 이판일장로 일가족(3대) 13인과 교인 35인 전체 48인도 밀실 예배를 드리다가 이판일 장로는 묶인 채로 노모를 등에 업고 5살 어린아이와 함께 끌려가서 창에 찔리며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을 당하면서도 당당하게 가족들의 영혼을 주님께 부탁했다. 이때 폭도가 “죽을 놈이 웬 기도냐?”며 비난했지만 이판일 장로는 저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 기도하면서 주님 가신 그 길을 영적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와 함께 같은 날인 1950년 10월 5일 새벽에 거룩하고 고결한 순교의 길을 택했다. 임자진리교회 신자들은 교회 앞마당에 48인 순교기념탑을 세워, 순교신앙을 후세에 전하고 있다.

※ 경방단: 일제 말기인 1939년 7월 3일 치안을 강화하기 위하여, 조선총독부령 제104호로 경방단규칙이 제정 공포됨에 따라 소방조와 수방단을 해체하고, 방호단과 소방조와 수방단을 경방단으로 통폐합하여 10월부터 시행하였는데, 관설 소방기관원을 특별소방부원으로 편입하여 경찰보조기관으로 활동하게 하였다.

순교자교회(증동리교회) 061-271-7547
 순교자 문준경 증동리교회 바로가기 클릭
성지순례 안내 및 수련회 문의 : 증동리교회 김상원 목사 010-2646-0852
성지순례 안내 및 관광 안내 문의 : 증동리교회 이종화 안수집사(해설가) 010-3644-8882
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 무료관람 시간: 09:00~17:30(동절기 17:00), 주일 휴관

자료 및 사진이용 공지
본 자료와 사진은 이익을 목적으로 하는 영업적인 사이트 게시를 금하며, 출처를 제외한 글이나 사진만을 퍼가는 것도 금합니다. 이용하실 때는 반드시 본 자료 페이지에 대한 바로 가기 링크 등 출처를 표기하여주시고, 아래 연락처로 연락해주시기 바랍니다.

전남 신안군 소속 문화관광해설가 이종화 010-3644-8882
(증도 숙박 및 여행관련 문의 시 감사하는 마음으로 답변 드리겠습니다.)


증도펜션민박 홈페이지 http://j-minbak.com









풀장 주변 : 4㎞ 이상 은빛 해변, 짱뚱어다리(갯벌), 한반도 해송 숲 파란 바닷물에서 누구나 안전하게 물놀이를 할 수 있는 야외 대형 풀(성인 풀·유아 풀·대형 공용 풀 등 크기별 수영장), 풀장 내 파고라형 정자, 이국적 그늘막(파라솔),..
섬 교회의 어머니, 최초의 여성순교자 여성순교자 문준경(文俊卿: 1891~1950) 전도사는 1891년 2월 2일 전라남도 무안군(현 신안군: 신안군은 1969년 1월 1일 법률 제2059호에 의해 무안군에서 분군) 암태면 수곡리 문재경씨 3남 4녀 중 셋째 ..
MBC 수목드라마 고맙습니다 촬영지 화도 MBC 수목드라마 “고맙습니다” 촬영지인 증도는 전라남도 신안군에 속해 있으며, 신안군 도서 중 2010년 육지로 연결된 육지의 서남쪽 끝에 위치한 섬으로, 촬영 당시는 증도가 배를 타고 다니던 섬이..
시간조차 쉬어가는 꿈의 휴양지 엘도라도리조트 엘도라도리조트가 자리 잡은 전남 신안 증도는 하늘이 뿌려놓은 수많은 다도해와 황금빛 노을 바다, 오메가 일몰, 끝없이 펼쳐진 리아스식 해안과 넓은 은빛 백사장, 노송과 기암괴석이 빼어난 ..
2012 신안 섬 갯벌축제 힐링(healing) 갯벌이 좋다! 느려서 더 행복한 섬! 신안군 “증도”에서 “힐링 갯벌이 좋다”라는 주제 아래 8월 3일부터 8월 5일까지 3일간 2012 신안 섬 갯벌축제가 열립니다. 갯벌 힐링과 슬로우 문..
체험관광, 숙박 문의 : 010-3644-8882 (http://j-minbak.com) 맨발 갯벌생태체험 문의 : 061-275-8400(신안갯벌센터) 자전거 체험 문의 : 010-6662-3384(문경오) 낚시배 이용 문의 : 010-3632-2218(조종인) 낚시 관련 문의 : 061-271-76..
 
  • 내가 찜한
    목록이
    없습니다.
  • 오늘 본
    목록이
    없습니다.

대표: 이주청 / 증도펜션민박협의회
주소: 전남 신안군 증도면 보물섬길 114 전화(총무): 010-3644-8882 admin